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드룬 부르비츠 (문단 편집) == 성인이 된 이후와 [[나치]] 옹호 활동 ==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치]] 이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변호할' 책이 아니라[* 변호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죄를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책을 쓰고 싶어했다. '오늘날에 나폴레옹, 웰링턴, 몰트게가 거론되는 방식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녔다. 구드룬은 끝까지 자신에게 다정했던 아버지를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확신했고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아버지의 직업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는 "제 아버지는 SS 국가지도자였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삶은 나치 거물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학교 입학 요구를 거절당했다가 간신히 입학하고[* 1947년 응용예술학교에 입학하려고 할 때의 일. 교장이 이름을 보고 즉각 거부했다. 그러나 [[연좌제|전범 혐의가 가족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빌레펠트 사회민주당 대표가 개입해서 등록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의 젊은 민주주의는 부모들의 잘못으로 그 자식들이 고통받도록 만들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구드룬은 재단사 교육을 받는다.], 성을 밝힐 때마다 해고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직장 동료들에게 기피당하고, 손님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거부당하는 등 거부와 왕따의 끝없는 반복으로 점철되었다. 1955년에 영국 정치인 [[오스왈드 모슬리]][* 영국의 유명한 파시스트 정치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창설했다. 반유대 폭동을 수차례 자행하였으며 무솔리니, 히틀러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다가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연금되었다. 종전 이후 석방되어 다시 파시스트 짓을 하고 다녔다.]가 히틀러 시대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아들인 아돌프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마련한 야회에 참석했는데 자긍심을 드러내면서 많은 파시스트를 만났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가, 자신이 일하던 펜션에서 손님이 '''"제 아내도 아우슈비츠의 가마에서 불에 타 죽었는데, 어떻게 제가 그런 여자에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하는 바람에 결국 쫓겨난 적도 있다. 구드룬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불프 디터 부르비츠(Wulf Dieter Burwitz)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게다가 남편도 힘러의 이상을 추종했다고 한다. 그녀는 '''[[네오 나치]]'''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고 1951년 이후부터는 징역을 살고 있거나 도주 중인 [[SS]] 단원들을 구원하는 모임인 '슈틸레 힐페(Stille Hilfe, 번역하면 '조용한 손길' 또는 '침묵의 원조')' 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수십 년 간 구드룬은 '슈틸레 힐페' 의 상징으로 활동했고 모임을 주최하거나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나치]]의 공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전쟁포로와 수감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책임지고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치의 남미 도주]]에도 관여했고,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도 이곳의 네트워크에 도움을 받았다. 이 조직은 옛 나치 당원들하고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오 나치 운동을 위한 비자금을 공식적으로 모았다. 구드룬은 SS 상사이자 힘러의 측근이고, 수용소 수감자들이 가장 두려워했으며 가장 잔인했던 관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범 안톤 말로트가 2001년에야 유죄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받았을 때 주요 지지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슈틸레 힐페는 말로트가 최고급 양로원에 거처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 양로원이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많은 비판이 일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도 쏟아지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2년에 말로트가 죽을 때까지 꾸준히 면회를 갔다. 1952년에는 [[나치]]의 [[유겐트]]를 모방한 비킹 유겐트(Wiking-Jugend)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이 조직은 1994년 활동이 금지된다.) 전후 [[네오 나치]] 활동의 주축인 '블랙 위도우' 플로렌티너 로스트 판 토닝언(Florentine Rost van Tonningen)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구드룬은 한때 [[뮌헨]] 근교의 고급 요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근래에도 [[나치]]의 [[전범]]을 구원하고 원조하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예를 들면, 2010년에 슈틸레 힐페가 네덜란드 나치 전범 클라스 카렐 파버[* 전쟁기간 동안 유대인과 반독일 운동가를 합해 총 22명을 살해했다. 1947년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본국으로 인도되는 걸 막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심지어는 네오 나치가 관여한 적이 있다는 [[뮌헨 올림픽 참사]]에도 '''구드룬의 개입이 있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다. 또한 극우정당 NPD를 지지한다. <나치의 아이들>의 저자는 아버지의 명예를 복원시키려고 노력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이상을 따라가려 한다고 평한 바 있다. [[2018년]] [[5월 24일]]에 자신이 생활하던 요양원에서 향년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http://m.spiegel.de/einestages/tod-von-gudrun-burwitz-heinrich-himmlers-tochter-nazi-bis-zuletzt-a-1215755.html|#]] 사후 뒤늦게 1960년대에 독일 연방정보국(BND) 직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1018389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